영국 법원서 일부 승소했지만 배상책임 뒤집지 못해
[이슈밸리=권동혁 기자] 정부가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과의 국제투자분쟁(ISDS)에서 약 1530억원의 배상책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이뤄진 정부의 개입이 장기간의 국제분쟁을 거쳐 국가 재정 부담으로 돌아왔다.
법무부는 지난달 30일 선고된 엘리엇 ISDS 환송중재 판정에 대해 영국 법원에 취소소송 등을 제기하지 않기로 했다고 28일 밝혔다. 관계부처와 정부 대리 로펌,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판정문 분석 결과와 추가 소송 비용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정이라는 설명이다.
정부가 부담할 금액은 배상원금 약 4849만달러에 지연이자와 소송비용 등을 반영한 약 1530억원 규모다.
다만 이는 판정 당시 환율 등을 기준으로 환산한 금액으로, 실제 지급액과 지급 방식은 추가 논의를 거쳐 정해질 예정이다.
분쟁의 출발점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다. 당시 삼성물산 주주였던 엘리엇은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부당하게 개입해 손해를 입었다며 2018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근거한 국제중재를 제기했다.
원 중재판정부는 2023년 6월 정부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정부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한미 FTA상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조치로 볼 수 없다며 같은 해 7월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소송을 냈다.
이후 법적 공방은 각하와 항소, 환송을 거듭했다. 2024년 8월 영국 1심 법원이 정부의 소송을 각하했지만, 지난해 7월 항소법원이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돌려보냈다. 올해 2월에는 환송심 법원이 국민연금을 국가기관으로 볼 수 없다는 정부 측 주장을 받아들여 원 중재판정을 일부 취소했다.
그러나 이 판결이 정부의 합병 개입에 따른 책임까지 없앤 것은 아니었다. 영국 법원은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개입한 행위와 엘리엇의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중재판정부가 다시 판단하도록 했다.
지난 3월 시작된 환송중재에서도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판정부는 정부의 합병 찬성 개입과 엘리엇의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해 원 중재와 동일한 배상원금 및 지연이자 등을 지급하도록 했다. 지연이자에는 연 복리 5%가 적용됐다.
정부의 추가 소송 중단은 승소 가능성과 비용을 함께 따진 결정으로 볼 수 있다. 영국 법원에서 일부 법리적 주장을 인정받았더라도 환송중재에서 배상책임이 재차 인정된 만큼, 소송을 이어갈 실익을 검토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번 사건에서는 국민연금의 법적 지위를 둘러싼 다툼을 거친 뒤에도 정부 개입과 투자자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가 인정됐다. 공적 기금의 의사결정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국제협정에 따른 국가 배상책임으로 이어진 것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정부는 앞으로도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여 철저히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배상금 지급과 관련한 구체적인 방안과 액수는 논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8년여에 걸친 국제투자분쟁은 마무리 수순에 들어갔다. 그러나 합병 과정에서의 정부 개입이 남긴 재정 부담은 국가가 떠안게 됐다. 국민연금의 독립적인 의사결정과 정부 권한 행사의 무게를 약 1530억원의 배상책임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국가적으로 뼈아픈 분쟁으로 남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