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프한 외모·중저음 목소리 넘어 표정과 여백으로 인물 완성
[이슈밸리=임정은 기자]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 배우 원지안이 등장하면 화면의 온도가 달라진다. 날카로운 눈매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표정 때문이다.
원지안이 연기하는 이케다 유지는 오사카 야쿠자 조직의 수장 이케다 오사무의 수양딸이자 조직의 2인자다. 권력의 정점에 오르려는 야망을 품고 백기태(현빈)와 손잡는다. 누군가의 단순한 오른팔이라기보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백기태와 전략적 동맹을 맺은 독립적인 야심가에 가깝다.
백기태와 유지 사이에는 확실한 신뢰도, 노골적인 애정도 없다. 서로의 힘이 필요한 동안 협력하지만 언제든 상대를 밀어낼 수 있다는 긴장감이 흐른다. 원지안은 감정을 크게 분출하지 않고 시선의 방향과 말의 속도만으로 이 위태로운 관계를 표현한다.
그는 작품 공개 후 인터뷰에서 두 사람의 에너지를 “칼날과 칼날이 서로 맞부딪히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현빈이 묵직한 힘으로 장면을 밀어붙인다면 원지안은 차갑고 예민한 기운으로 이를 받아낸다. 선배 배우의 힘에 기대기보다 자신만의 리듬으로 맞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원지안의 다른 얼굴을 보고 싶다면 ‘경도를 기다리며’
그런데 원지안이라는 배우의 폭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오히려 JTBC 드라마 ‘경도를 기다리며’다.
원지안은 이 작품에서 자림어패럴 차녀 서지우를 연기했다. 서지우는 대학 시절 만난 이경도(박서준)와 사랑에 빠지지만 뜻하지 않은 사정으로 헤어진 인물이다. 두 사람은 스무 살과 스물여덟 살에 만나 사랑하고 헤어진 뒤, 시간이 흘러 기자와 불륜 스캔들 당사자의 아내라는 뜻밖의 관계로 다시 마주한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이케다 유지가 타인의 약점을 먼저 살피는 인물이라면 ‘경도를 기다리며’의 서지우는 자신의 상처를 감춘 채 사랑 앞에서 흔들리는 사람이다. 유지가 차갑게 벼린 칼날이라면 지우는 한때의 사랑을 오랫동안 품고 살아온 사람의 온기를 지녔다.
대학생 시절의 서지우는 청순하고 싱그럽다. 경도 앞에서 웃고 토라지고 망설이는 표정에는 첫사랑 특유의 서툰 감정이 담겼다. 반면 시간이 흐른 뒤의 지우에게서는 재벌가의 화려한 외형과 그 안에 감춰진 외로움이 함께 드러난다.
원지안은 이를 과도한 눈물이나 대사로 설명하지 않는다. 웃고 있으면서도 금방 눈물이 고일 것 같은 얼굴,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상대의 한마디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지우의 내면을 보여준다. 시청자가 배우의 연기를 의식하기 전에 인물의 감정을 먼저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이 강점이다.
박서준과 만든 자연스러운 첫사랑의 시간
박서준과의 호흡도 작품의 설득력을 높였다. 두 사람은 실제 나이 차가 있지만 화면에서는 오랜 시간을 함께 건너온 연인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박서준도 종영 인터뷰에서 원지안에 대해 처음 만났을 때 나이 차이를 걱정했지만, 차분한 모습을 보며 현재의 서지우까지 충분히 표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임현욱 감독 역시 편집 과정에서 호흡이 좋다는 평가를 전했다고 한다.
특히 원지안은 스무 살의 풋풋함과 성인이 된 뒤의 현실적인 고민, 긴 이별을 거친 인물의 쓸쓸함을 하나의 감정선 안에서 연결했다. 젊은 배우가 여러 연령대의 한 인물을 연기할 때 나타나기 쉬운 인위적인 말투나 과장된 변화도 크지 않았다.
‘경도를 기다리며’에서 원지안의 연기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다. 박서준이 장면의 중심을 안정적으로 잡으면 원지안은 예상보다 한 박자 늦은 반응과 섬세한 표정으로 감정의 여운을 만든다. 두 배우가 주고받는 연기는 화려하기보다 편안했고, 그래서 오래된 첫사랑의 기억처럼 남았다.
수지·이민정·김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그러나 원지안은 원지안
원지안의 외모를 두고 장면에 따라 수지의 맑은 분위기, 이민정의 또렷한 이목구비, 김사랑의 세련된 이미지를 떠올리는 시선도 있다. 긴 얼굴선과 선명한 눈매 때문에 어느 각도에서는 청순하게, 다른 각도에서는 차갑고 도시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지안의 경쟁력은 누구를 닮았다는 인상에 머물지 않는다. 같은 얼굴을 작품에 따라 전혀 다르게 사용한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상대를 응시하는 것만으로 위협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경도를 기다리며’에서는 환하게 웃는 얼굴 하나로 대학 시절의 생기를 되살린다. 중저음의 목소리 역시 유지에게는 냉정한 권력자의 무기가 되지만 지우에게는 쉽게 속마음을 꺼내지 못하는 사람의 쓸쓸함으로 들린다.
짧은 경력보다 빠르게 쌓인 연기 밀도
1999년생인 원지안은 2021년 넷플릭스 ‘D.P.’로 얼굴을 알린 뒤 ‘소년비행’, ‘당신이 소원을 말하면’, ‘가슴이 뛴다’, ‘오징어 게임’ 시즌2 등에 출연하며 활동 폭을 넓혔다.
초기 작품부터 어둡거나 결핍을 지닌 인물을 자주 맡았지만, ‘경도를 기다리며’를 통해 로맨틱 코미디와 정통 멜로도 소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어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는 권력을 탐하는 야심가로 변신하며 다시 한번 익숙한 이미지를 벗어났다.
원지안은 아직 작품 수가 아주 많은 배우는 아니다. 그런데도 화면에서 느껴지는 안정감은 경력의 길이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대사를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장면을 붙잡고, 상대 배우의 연기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조용하지만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배우다.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 이케다 유지의 냉혹한 행보를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라면 ‘경도를 기다리며’를 통해 원지안의 전혀 다른 얼굴을 확인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서늘한 야쿠자 조직의 실세와 첫사랑을 잊지 못한 재벌가의 딸. 두 인물 사이의 거리는 멀지만 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배우는 한 사람이다.
원지안의 진짜 매력은 특정한 이미지가 아니라, 작품마다 자신의 얼굴을 새롭게 바꿔놓는 힘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