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형 변호사 칼럼] 비동의 간음죄와 성인지 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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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형 변호사 칼럼] 비동의 간음죄와 성인지 감수성
  • 이슈밸리
  • 승인 20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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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밸리=칼럼] 최근 여성가족부는 일명 ‘비동의 간음죄’ 도입을 검토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법무부가 당일 ‘비동의 간음죄 개정 계획이 없다’는 발표를 하자, 여성가족부 또한 곧바로 ‘비동의 간음죄 개정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혀 비동의 간음죄 도입은 없었던 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법무법인 해마루 박재형 변호사
법무법인 해마루 박재형 변호사

이와 같이, 이번 일은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소위 비동의 간음죄 입법은 여성계의 숙원이라고 할 정도로 오래전부터 논의되어온 주제이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논의될 것입니다.

비동의 간음죄 또는 비동의 강간죄는 성폭행을 ‘성관계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과 성관계를 하는 행위’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현행 대한민국 형법은 원칙적으로 폭행 또는 협박을 강간죄, 강제추행죄의 성립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비동의 간음죄가 도입될 경우 폭행 또는 협박이 없어도 성관계에 대한 피해자의 동의가 없다면 범죄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비동의 간음죄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도입이 논의되는 법은 아닙니다. 상당수의 선진국은 이미 비동의 간음죄를 도입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영국, 독일, 아일랜드, 스웨덴,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일부 주는 폭행 협박이 없었더라도 피해자의 동의 없는 성적 침해를 강간죄 등 성폭력 범죄로 규정하여 처벌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같이 여러 선진국에서 이미 비동의 간음죄를 도입하였으나, 우리나라에도 이를 도입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찬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비동의 간음죄 도입을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성범죄 성립에 폭행, 협박을 요건으로 할 경우, 가해자의 일상적인 폭력과 다양한 억압에 시달린 피해자가 가해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성관계를 해야만 하는 경우와 같이, 처벌의 필요성이 있음에도 처벌을 할 수 없는 법의 사각지대가 발생한다는 것을 주요 논거로 합니다.

반면 도입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성범죄 성립 여부가 전적으로 피해자의 의사에 의해 좌우되어 무고에 의한 피해자가 많아질 것이라는 점 등을 반대 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비동의 간음죄를 도입할 것인지는 위와 같은 찬반 주장의 논거들과 이미 이를 시행하고 있는 선진국들의 사례를 검토하여 사회적 합의로 결정할 문제입니다.

다만 변호사로서 실제 현장에서 성범죄 사건을 다루는 필자로서는, 아래와 같은 점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 비동의 간음죄를 도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우선 과거 판례들이 강간죄 성립을 위한 폭행, 협박의 정도는 피해자의 억압을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고 보았으나, 현재 판례들은 강간죄 성립을 위한 폭행, 협박의 범위를 상당히 넓게 보고 있고, 강제추행죄는 추행 행위 자체를 폭행으로 보고 있어, 과거보다 상당히 폭넓게 강간죄, 강제추행죄 성립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한편 형법과 성범죄에 관한 특별법들은 폭행, 협박에 의한 성범죄만 처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상하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 피해자가 미성년자인 경우 등에는 위력과 위계에 의한 성범죄도 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등,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따라 성범죄가 인정되는 경우를 상당히 촘촘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안희정 전 도지사가 업무상 위력, 위계에 의한 간음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처벌된 사례는 직장 내에서의 상하관계를 고려하여 사실상 비동의 간음죄 성립을 인정하여 처벌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대한민국 형법이 성범죄 성립에 원칙적으로 폭행, 협박을 요건으로 하는 듯 하나, 실제로는 상당히 다양한 유형의 성범죄를 규정하여 피해자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경우에는 사실상 비동의 간음죄로 처벌하고 있는 것이므로, 피해자의 취약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반적인 경우까지 비동의 간음죄를 규정하여 처벌할 필요성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한편 필자가 우리나라에 비동의 간음죄 도입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소위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일반적인 범죄 피해자의 진술보다 성범죄 피해자의 진술에 상당한 신빙성을 부여해 주는 현재 대법원 판례 때문입니다.

비동의 간음죄의 도입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비동의 간음죄가 도입된다고 할지라도 성범죄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형사소송법상의 증거법칙에 따라 피해자의 비동의가 입증되어야 하므로,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무고한 사람이 가해자로 몰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성인지감수성 개념을 통해 성범죄에만 적용되는 증거법칙의 예외가 인정되는 상황에서 비동의 간음죄까지 도입될 경우, 비동의 간음죄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 우려, 즉 성범죄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의 진술만으로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비동의 간음죄를 도입하여 법의 사각지대를 없애려는 의도 자체는 선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비동의 간음죄 도입을 검토하면서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사람을 없게 해야 한다는 형사법의 대원칙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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