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리스크 빠르게 원천 차단...오너 직접 나서는 계기
[이슈밸리=한유진 기자] #60대 A씨는 "이재용 회장이 머리 숙여 사죄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나더라고요. 회장이 무엇을 그렇게 잘 못했나요"
# 40대 B씨는 "어제 5.18 탱크 논란 때문에 더 이상 스타벅스 안 가려다가, 하루만에 정용진 회장 사과문 보고 그래도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습니다. 스타벅스는 계속 가기로 했어요"
두 사례는 기업 회장의 빠르고 진심어린 사과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이처럼 최근 국내 주요 대기업 전반에서 리스크가 발생했을 때 총수가 직접 나서 전격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이른바 ‘초고속 사과 리더십’이 뚜렷한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노사 갈등 위기 직후 공항 입국장에서 곧바로 세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매서운 비바람은 내가 맞고 다 제 탓으로 돌리겠다”고 선언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나, 계열사 마케팅 논란이 불거진 직후 “그룹을 대표해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며 대국민 사과문을 신속히 발표한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의 행보는 재계의 변화된 기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사실 이 같은 사안들은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실무진이나 계열사 사장단 선에서 정리가 가능하며, 총수가 직접 전면에 나설 법적 의무는 없는 일들이다.
그러나 최고경영진이 선제적으로 책임을 떠안는 파격적인 행보는 과거 국내 재벌 총수들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취했던 대응 방식과 비교했을 때 대응의 ‘질’과 ‘속도’ 면에서 완연한 차이를 보인다. 재계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감성적 대중 관리가 아닌, 리스크 확산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고도의 경영 전략이자 대외 리스크 예방책이라고 입을 모은다.
◇ 늑장 대응과 책임 회피: 기업을 존폐 위기로 몰았던 과거의 잔혹사
과거 오너 1~2세대 시절 국내 기업들의 위기관리 공식은 ‘보안주의’와 ‘실무자 선에서의 꼬리 자르기’였다. 총수의 권위는 절대적인 무오류의 영역으로 여겨졌기에, 사과를 하는 행위는 곧 경영권의 약점 노출이나 법적 책임을 고스란히 인정하는 패착으로 간주됐다.
이로 인해 사태 초기에는 무조건적인 부인이나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뒤에야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는 ‘늑장 사과’가 반복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1년 발생한 두산전자의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다. 당시 영남 지역 전체의 식수원을 오염시킨 초유의 환경 재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산그룹은 초기 실무 책임자 처벌과 계열사 사장 선에서 사태를 조기 무마하려 시도했다.
기업의 안일한 인식과 책임 회피성 태도는 국민적 공분을 샀고, 결국 전국적인 불매운동으로 확산된 뒤에야 박용곤 회장이 그룹 회장직에서 사퇴하는 파국을 맞이했다.
2007년 삼성중공업의 ‘태안 기름유출 사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충청도 서해안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대형 재난이었으나, 당시 경영진은 법적 책임 공방에만 치중하며 소극적인 소통 태도를 유지했다. 대외적인 공식 사과문이 나오기까지 수개월이 소요되면서 기업 이미지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2013년 남양유업의 대리점 갑질 사태 또한 영업사원의 폭언 녹취록이 폭로된 이후 공식 사과를 하기까지 약 한 달에 걸쳐 책임을 회피하다가, 전국적인 불매운동의 직격탄을 맞고 시장 주도권을 영구히 상실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 초연결 사회와 글로벌 ESG, ‘골든타임’을 재정의하다
이처럼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오늘날 총수들이 ‘빛의 속도’로 사과하는 가장 큰 배경에는 스마트폰과 SNS로 무장한 ‘초연결 사회’의 도래가 있다. 현대의 리스크는 과거처럼 언론 보도를 유예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단 몇 분 만에 전 세계로 확산되며 가짜 뉴스와 결합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리스크 관리의 골든타임이 ‘수 주’에서 이제는 ‘단 몇 시간’ 단위로 압축된 것이다. 초기 대응 타이밍을 놓치면 기업은 즉각 ‘소비자를 기만하는 불통 기업’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두 번째 배경은 글로벌 자본시장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압박과 공급망 관리의 엄격성이다. 현대 대기업의 가치는 단순히 내수 시장의 평판에 머물지 않고 글로벌 주가와 직결된다.
이재용 회장이 노사 갈등 국면에서 선제적으로 사과문을 발표한 것 역시 애플, 엔비디아(Nvidia), HP 등 글로벌 빅테크 파트너사들과의 신뢰 관계를 유지하고, 해외 투자자들의 리스크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한 고도의 경영학적 판단이다.
여기에 글로벌 리스크 관리의 선진국인 미국식 CEO 위기관리 공식(Crisis Management)을 적극 도입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1982년 존슨앤드존슨이 타이레놀 독극물 주입 사건 당시 경영진의 즉각적인 대국민 사과와 전량 수거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사례나, 2010년 도요타 리콜 사태 때 도요타 아키오 사장이 미 청문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전격 사과해 전 세계적 반발 여론을 잠재운 사례처럼, 현대적 의미의 사과는 법적 책임의 인정을 넘어 ‘브랜드 자산 가치의 보호’와 ‘고객과의 관계 복원’을 위한 필수적인 투자로 인식되고 있다.
◇ ‘가업 수성’에서 ‘시스템 경영’으로: 오너 3세대가 주도하는 리더십 대전환
특히 재계에서는 이처럼 신속하고 파격적인 사과 문화를 선도하는 총수들이 모두 ‘오너 3세대(혹은 4세대)’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을 비롯해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은 기업의 도약기와 글로벌 확장기를 이끈 주역들로, 과거 1·2세대 창업주들과는 확연히 다른 성장 배경과 가치관을 공유한다.
창업주나 2세 회장들은 기업을 맨손으로 일구는 과정에서 무소불위의 카리스마를 행사했으며, 기업을 오너 가문의 배타적 소유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짙었다.
반면 해외 명문대에서 MBA를 이수하고 글로벌 비즈니스 현장을 누비며 성장한 오너 3세대들은 기업을 대중의 평판과 주주 가치 위에 서 있는 ‘공적 시스템’으로 바라본다. 이들에게 오너란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아니라, 기업이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원활히 돌아가도록 리스크를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의 보직일 뿐이다.
또한, 태생적으로 자수성가형 인물이 아닌 경영권을 승계받은 위치에 있기에 대중으로부터 훨씬 더 엄격한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잣대를 요구받는다는 점도 작용한다.
3세대 오너들은 과도한 특권 의식을 드러내며 버티는 구조가 승계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대중적 비난을 가중시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위기 앞에서 권위를 과감히 내려놓고 “내가 매를 맞겠다”며 직접 정면 돌파하는 유연성과 합리성이야말로, 21세기형 오너 3세대가 선택한 새로운 생존 방식이자 진화된 리더십의 본질인 것이다.
김성수 시사문화평론가는 "과거에는 기업에 문제가 생기면 실무자나 사장단 선에서 꼬리를 자르고 총수는 뒤로 숨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중이 총수의 태도를 직접 보고 기업의 진정성을 평가한다. 리스크가 터졌을 때 오너가 전면에 나서서 빠르게 매를 맞는 것이, 장기적인 브랜드 훼손을 막고 사태를 조기에 진화하는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