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주의 청진기] 공감과 냉정함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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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주의 청진기] 공감과 냉정함 사이
  • 이슈밸리
  • 승인 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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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밸리=칼럼] 어느 환자 한 분이 진료를 다 마쳐 갈 무렵에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동주 해드림 가정의학과 원장
이동주 해드림 가정의학과 원장

“하루 종일 힘드시지 않으세요? 다른 사람들은 의사라는 직업이 좋은 직업이라고들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루 종일 저처럼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 하는 사람들만 만나실거 아니에요. 변호사도 그렇고 의사도 그렇고 만나러 오는 사람마다 좋은 얘기는 없고 힘들다, 아프다 하는 얘기만 할텐데 얼마나 안 좋은 직업이에요.”

 “아닙니다. 그래도 그게 제 일인데요 뭐” 라고 대답하면서도 환자분의 얘기는 부인할 수 없는 지점이었습니다. 내가 아픈 것도 아니고 내가 힘든 것도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힘들고 아프다는 얘기를 듣는 일은 참 힘겨운 일입니다. 그것을 공감이라 할 수 있을는지 책임감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에게 온 환자의 아픔을 마냥 남의 아픔으로만 여길 수 없고 내 것처럼 같이 겪어야만 하는 삶이 매일 반복된다는 것, 그것이 의사로서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어려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빨리 털어내는 것도 일입니다. 같이 공감하고 아파하는 의사가 좋은 의사일 것 같지만 의사는 한 사람만의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마냥 공감하고 아파할 수만도 없습니다. 얼른 그 다음 환자를 만나야 하고 또 상황을 듣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위치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냉정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 또한 공감의 어려움만큼이나 힘든 일입니다.

 어느 날인가 하루 종일 환자를 보고 퇴근을 앞둔 시간이었습니다. 그날에도 코로나 예방 접종 환자들이 많았고 예방 접종 이후 부작용이 있다는 상담만 열 건도 넘게 했던 하루였습니다. 의사 입장에서는 백신 접종을 하는 것이 부작용보다 득이 크다는 확신을 가지고 접종을 하지만 환자들은 여전히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고 게다가 본인에게 부작용이 의심되는 증상까지 생기니 얼마나 불안할까 싶어 환자분이 불안하지 않게 상담을 하는 것에 신경을 씁니다. 

그러면서도 혹시 모를 위험한 증상을 잘 감별해야하기 때문에 은근히 신경 쓰이는 것이 많은 상담입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퇴근하려는 순간이었는데 오랜 기간 연락이 없던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아내가 유방암 판정을 받았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느 병원, 어느 의사에게 가야 하는지 묻기 위함이었습니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이 한 15분 걸리는데 집으로 가는 내내 그 친구로서는 처음 겪어보게 되는 당황스러운 상황들에 대해 이것저것 상담해주다 보니 집에 도착해서도 전화통화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전화를 마치고 저녁을 먹고 좀 쉬나보다 했는데 전화가 또 옵니다. 잘 아는 분으로부터 온 전화인데 얼마 전에 그 분의 외아들이 백혈병으로 골수 이식까지 한 상태입니다. 그 아들이 치료가 잘 진행되고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열이 난다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습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합니까, 이렇게 전화할 시간에 얼른 응급실로라도 데리고 가셔야죠’라고 쏘아붙일 뻔했다가 백혈병으로 외아들을 잃을 뻔한 아비의 마음이 얼마나 연약할까 싶어 또 그 입장에서 한참을 통화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날 하루 코로나 백신 부작용으로 당황하는 사람도 되었다가, 유방암 걸린 아내를 둔 남편도 되었다가, 백혈병 걸린 아들을 둔 아버지도 되었다가 하면서 이미 늦은 밤이 되어버렸고 같이 붙잡고 울 수만도 없고 더 이상의 말이 나올 수 없을 만큼 칼같은 처방만 내릴 수도 없는 공감과 냉정함의 그 어느 중간 지점 속에서 오락가락하며 지독한 피로감을 느꼈던 하루였습니다. 경증환자를 주로 보는 제가 이럴 지경인데 매일 생사를 오가는 환자와 함께하는 혈액종양내과, 외과, 흉부외과 선생님들의 삶은 그 공감과 냉정함 사이의 줄타기가 훨씬 더 치열할 것입니다.

 공감과 냉정함 사이, 의사가 서있어야 할 그 지점은 어디일까요? 어디인지는 몰라도 균형이 잡혔다 할 수 있는 그 지점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협소해지는 것 같습니다. 주변의 의사를 보면 너무 착한 의사는 손해를 보고 너무 냉철한 의사는 욕을 먹습니다.

그 협소한 지점에서 따뜻하게 공감하면서 능률적으로 자기 소임을 다하는 의사가 될 수 없을까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저같은 의사 또한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공감과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고 정신이 번쩍드는 냉철한 평가와 처방이 필요할 때도 있는 평범한 소시민이기에 그 지점에서 비틀거리지만 쓰러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매일 느끼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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