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형 변호사 칼럼] 성인지 감수성과 무죄추정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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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형 변호사 칼럼] 성인지 감수성과 무죄추정의 원칙
  • 이슈밸리
  • 승인 2021.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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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밸리=칼럼] 대법원은 2018년 대학 교수가 학생들을 성희롱 하였는지가 쟁점이 된 교수 해임에 관한 행정소송에서‘성인지 감수성’ 개념을 도입하여, 법원이 성폭력이나 성희롱 사건의 심리를 할 때는 구체적 사건에서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법무법인 해마루 박재형 변호사
법무법인 해마루 박재형 변호사

이후 ‘성인지 감수성’ 개념은 성폭력 관련 형사재판에 그대로 사용되어, 법원이 성폭행, 성희롱 사건의 심리를 할 때 피해자의 구체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판단기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성폭행,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되는 2차 피해를 입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피해자가 상당기간 피해신고를 꺼리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으므로, 피해자에게 소위 피해자다움을 요구하지 않고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타당합니다.

다만 일각에서는 대법원이 ‘성인지 감수성’ 개념을 도입하여 성폭력 범죄를 판단하기 시작한 이후, 성범죄 사건에서는 헌법의 대원칙인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고 피고인이 유죄로 추정된다는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성인지 감수성’ 개념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성인지 감수성 개념은 결코 무죄추정 원칙을 해하거나 흔드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개별적 특성을 고려하는 것이고, 오히려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는 개념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성범죄 사건을 다루고 있는 변호사의 입장에서는, ‘성인지 감수성’이 단지 사건의 개별적 특수성을 고려하는 원칙으로 작용하는 것을 넘어, 성범죄 사건에서 무죄추정의 원칙 적용을 완화 내지 배제시키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필자가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수사단계에서부터 재판까지 변호했던 강간 고소사건의 경우, 고소인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제반 정황상 도저히 성폭행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사건이었습니다. 이에 해당 사건은 공소제기 되지 않고 검사에 의해 불기소 처분으로 종결되는 것이 당연한 사건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건의 첫 번째 담당검사는 사건을 맡은 후 판단을 하지 않은 채 6개월가량 사건을 묵히다가 인사이동 때 후임자에게 사건을 넘겼고, 후임 검사는 피고인을 강간으로 공소제기 하였습니다.

다행히 피고인은 재판에서 강간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아 자신의 무고함을 밝힐 수 있었지만, 약 2년간 수사, 1심, 2심 재판을 받으며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떨어야 했습니다.

이 사건의 경우, 성인지 감수성 개념이 수사기관의 무리한 공소제기에 영향을 미쳤고, 그로 인해 피고인이 부당한 피해를 입게 된 사건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이, 성인지 감수성 개념은 성폭행 사건에서 법원의 심리 원칙으로 사용되는데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수사기관의 수사와 공소제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일각의 비판처럼 일부 성폭행 사건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후퇴시키는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법원과 수사기관이 성범죄 피해자의 개별적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은 매우 타당합니다. 그러나 법원과 수사기관이 피해자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는데 그치지 않고 무죄추정 원칙을 후퇴시키는 것은 위헌적인 법집행입니다.

법원과 수사기관은 성인지 감수성을 가지고 사실판단을 하되, 헌법과 법률의 대원칙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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