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증오의 대상에서 국가적 버팀목으로...세대 인식 바뀌는 이유

2026-02-11     이슈밸리

 

[이슈밸리=윤대우 기자] 과거 한국 사회에서 ‘재벌’은 부와 권력의 상징인 동시에 시기와 비판의 대상이었다. 산업화 시기 창업 1세대와 2세대는 경제성장의 주역이었으나, 대중 정서 속에서는 특혜와 정경유착, 불평등의 상징으로 소비되며 늘 '공공의 적'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재벌 3·4세들을 향한 대중의 시선은 날 선 비판 대신 ‘팬덤’과 ‘신뢰’로 채워지고 있는 분위기다. 단순히 언론의 홍보 전략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 기류의 핵심은 무엇일까. 

◆ 특권 대신 ‘정공법’을 택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대중이 최근 재벌가에 열광하는 지점은 그들이 가진 부 자체보다, 그 부를 관리하고 증명해내는 ‘과정의 정당성’에 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아들을 서울대 경제학과에 진학시킨 사례는 교육열 높은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재벌이라면 유학을 보내든, 편법으로도 대학에 보낼 수 있을 텐데, 정공법을 택했다"는 사실이 공정성을 중시하는 MZ세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이러한 ‘정공법 리더십’은 병역 문제에서 정점을 찍는다. 삼성가 4세 이지호 씨는 미국 출생 복수국적자임에도 불구하고 해군 장교 임관을 위해 스스로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복무 기간이 짧은 일반 사병 대신 39개월에 달하는 장교의 길을 택한 것은 '꼼수'가 아닌 '책임'을 택했다는 점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조부와 부친이 병역 면제를 받았던 과거사와 대비되면서, 삼성의 새로운 리더십이 '사회적 책임'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차녀 최민정 씨 역시 재벌가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해군 장교로 자원입대해 아덴만 파병까지 다녀온 '여장부'로 각인되어 있다. 전역 후에도 아버지의 그늘에 머물기보다 독자적인 커리어를 개척하고, 군 복무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건강 관련 사업을 시작하는 등 특권층의 화려함보다 인간적인 고뇌와 공익적 가치를 우선하는 모습이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 ‘엄근진’을 벗어던진 인간미와 낭만적 의리

과거 재벌들이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였다면, 지금의 리더들은 대중과 같은 언어로 소통하며 거리감을 좁히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대중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보다 "제가 동생입니다"라는 식의 유머나, 세계 최고 수준의 로봇 회사 CEO답지 않은 소탈한 ‘허당미’는 권위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는 젊은 층에게 강력한 매력 포인트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일본 현지에서 혼밥을 하거나, 직원 식당에서 편하게 식사하는 인간적인 면모 역시 그를 손흥민·유재석보다 ‘함께 하고 싶은 인물 1위’로 등극시킨 원동력이다.

 

 

여기에 한화 김승연 회장의 스토리도 주목받는다. 과거 아들 폭행사건에 연루돼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했으나 김 회장의 강한 이미지에 숨겨진 ‘의리’와 ‘따뜻한 인간미’가 재해석되는 현상도 흥미롭다. IMF 시절 직원 고용 승계나 고(故) 최동원 선수를 향한 남모른 후원, 만년 꼴찌 한화를 포기 하지 않고 지난해 한국시리즈 준우승 팀으로 만든 점 등은 차가운 자본가가 아닌 "사람 냄새 나는 리더"라는 재평가가 뒤따르고 있다.

◆ "당신들 덕분에 나라가 버틴다" 실용주의적 팬덤의 등장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이미지 메이킹을 넘어 한국 사회의 '공정' 담론과 맞물려 있다. 특히 10~30대 사이에서는 "결국 이 나라 경제를 지탱하는 것은 기업"이라는 실용주의적 인식이 확산 되고 있다. 최근 유튜브, 인스타 댓글에는 재벌을 욕하고 험담하기 보다는 “고맙습니다”라는 글이 눈에 띄게 많이 올라온다. 글로벌 경쟁 시대에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주역으로서 재벌가를 바라보는 '국가대표론'적 시각이다.

부를 세습하는 것에는 엄격한 잣대를 대던 대중이, 국가적 의무와 실력 증명이라는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는 재벌가 자제들에게는 "당신들이 있어 나라가 버틴다"는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제 재벌은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함께 호흡하는 '실력 있는 동반자'로 재정의되고 있다.

◆ 긍정적 기류 속, 경계해야 할 것도 분명 존재

우선 친근한 이미지와 따뜻한 인간미가 기업 경영의 본질인 '윤리 경영'이나 '노동 문제'를 덮어버리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시민단체 한 관계자는 “기업은 성장하지만 서민 경제와의 연결고리가 약해질 때, 지금의 우호적인 여론은 언제든 다시 차가운 비판으로 돌아설 수 있다”면서 “재벌가가 보여주는 '인간미'가 개인의 매력을 넘어 실질적인 사회적 가치 창출과 낙수효과로 이어져야 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결국, 최근 재벌이 보여주는 인간미와 정공법 리더십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반기업 정서'를 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이 친근함이 '면죄부'가 아닌 더욱 무거운 '책임감'으로 치환될 때, 비로소 한국의 재벌은 단순한 부의 가문을 넘어 사회적 존경을 받는 진정한 '노블레스'로 완성될 것이란 조언이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