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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주의 청진기]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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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주의 청진기] ‘약속’
  • 이슈밸리
  • 승인 2020.0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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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문제 분단국가 의사로서 큰 책임 부여받은 느낌
이동주 해드림 가정의학과 원장
이동주 해드림 가정의학과 원장

[이슈밸리=이동주 칼럼] 2018년 봄, 남북 정상 회담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당장에라도 남과 북이 그간의 적대적 관계를 정리하고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될 것만 같았던 그 때 우리 병원 진료실에  한 노인 환자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분은 이전에 수면 장애 문제로 한두 번 방문하셨던 적이 있는 환자분이었습니다. 이미 80세가 넘으신 고령으로 거동이 쉽지 않으셨지만 비교적 건강한 정신 상태와 신체를 가지셨던 분으로 매번 오시면 별말씀 없이 처방을 받아가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그날 만큼은 조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진료실에 들어오실 때부터 들떠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진료보다는 뭔가 다른 말씀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더니 역시나 진료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이 선생님, 뒤에 환자 없으시면 잠깐 시간 좀 되십니까?” 하시며 자신이 살아오셨던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분은 북에 가족을 두고 오신 실향민이셨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징집되어서 홀로 고향을 떠나 포항까지 내려오게 된 이야기, 그곳에서의 전투에서 자신의 동료가 모두 전사하고 홀로 살아남아 그 후 남의 집에 더부살이하며 너무나도 어렵게 학업을 이어갔던 이야기, 이 남한 땅에서 고아처럼 살아가며 온갖 설움을 겪으면서도 대학까지 졸업하고 지금까지 꿋꿋하게 살아온 이야기들을 마치 그 당시로 돌아가신 것처럼 저에게 생생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흡사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나 들을법한 이야기였고 북에 고향을 두고 온 분으로부터 직접 그러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도 저로서는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얼마 전 남북정상회담을 하는 것을 보면서 포기했던 기대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아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16살에 떠나온 내 고향을 다시 가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생겼던 순간이었다니까”

 그 분은 남북 정상회담을 보며 고향을 다시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그날 그렇게 장편 대 서사시 같은 그분의 일생을 제게 말씀하셨던 것이었고 결국에는 저에게 이러한 부탁으로 그 말씀을 마무리하시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선생, 나 조금만 더 살려주시오. 더도 말고 내가 고향을 다시 찾을 수 있을 때까지만 더 살려주시오. 이제 머지않아 될 것 같애.”

 그동안 저는 제가 하는 일과 남북 분단의 문제를 연관 지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북에 고향을 두고 고향을 그렇게 애타게 그리워하는 분을 실제로 만나 뵌 적도 없었지만, 환자를 치료하는 일과 남북의 분단이 연관되어 생각될 여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날 저는 처음으로 나와 상관없는 것 같았던 남북문제에 분단국가의 의사로서 큰 책임을 부여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일개 동네 의사에 불과한 제가 고령의 환자분을 몇 년 더 살리고 말고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그 책임감 앞에 저도 모르게 그러겠노라며 꼭 고향에 가실 날까지 제가 건강하게 지켜 드리겠다고 덜컥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그 분은 우리 병원을 꾸준히 방문하시면서 가지고 계신 만성질환을 관리하고 계시고 저 또한 그 약속이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그 고향 땅이 바로 개성입니다. 얼마 전 개성에 있는 남북 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제일 먼저 그 분이 생각났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몇 개월 전 그 분은 우리 병원에서 위내시경을 하다가 후두암이 발견되어 현재 힘겹게 방사선치료와 항암치료를 견디고 계시는데 이 안타까운 소식은 그분에게 당신의 암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소식이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고향에 갈 수 있을 때까지 살려드리겠다는 약속은 처음부터 저의 능력 밖의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만큼 정치, 외교, 경제의 복잡한 관계들이 모두 얽혀있는 남북 분단의 문제 또한 개인의 소망대로 쉽게 해결되지는 않으리라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약속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저 고향 땅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그분의 단순한 소망 앞에 이것저것 따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제는 조급한 마음이 앞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게든 그때까지 살려 드리겠다던 저의 약속이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지 않기만을 바라며 더욱 답답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되는 요즈음의 남북관계입니다.


<이동주 원장 이력>

마포고 졸업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가정의학과 전문의 
김포 해드림 가정의학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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