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주의 청진기] 어쩔 수 없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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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주의 청진기] 어쩔 수 없지 뭐?
  • 이슈밸리
  • 승인 2021.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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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이슈밸리=칼럼] 몇 년 전에 한 고등학생이 진료를 받으러 왔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내원하였고 어머니는 얘가 속이 안 좋다면서 밥을 잘 안 먹는다고 대신 얘기해줬습니다. 어머니가 증상을 얘기하는 동안에도 이 학생은 말이 없었고 정말 식사를 잘 못한 사람처럼 퀭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위장관 증상이 있다고 해도 10대 학생에게 바로 내시경을 해보자는 권유는 잘 하지 않는데 이 학생의 얼굴이 너무 어두웠고 증상도 심상치 않은 것 같아 마침 공복 상태라 하기에 바로 내시경 검사를 시행했었습니다.

내시경 검사 상 이 학생의 위는 한마디로 처참했습니다. 매일 술과 스트레스에 찌들어 사는 50대 아저씨의 위도 이런 경우는 없었습니다. 위벽 여기저기에서 스며나오듯이 피가 맺혀있었고 전반적으로 부어있는 위점막이 온통 손톱으로 긁힌 것처럼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이동주 해드림 가정의학과 원장
이동주 해드림 가정의학과 원장

모든 현상의 원인을 한가지로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내시경 후 소견을 가지고 학생과 어머니와 얘기를 나누면서 이러한 소견의 원인이 될 만한 이 학생의 고단한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도 없이 매일 밤늦게까지 학원 수업이 계속되었고, 식사 시간을 제때 지키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좋은 대학을 가야만 한다는 불안과 압박감에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많다며 울먹이는 학생의 말을 들으니 아까 학생의 위점막을 들여다 볼 때보다도 더욱 제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처참했던 학생의 위점막은 학생이 겪고 있는 현실에 비하면 차라리 평온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어린 학생들이 위점막이 헐고 피가 나도록 고생하고 노력해서 얻어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누가 이렇게 어린 학생들을 속으로 멍들게 하는 전쟁터에 내버려 둔 것인지 생각이 들면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를 더욱 화가 나게 하는 것은 그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치료와 처방이었습니다. ‘식사 잘해야 하고, 스트레스 받지 말아야 하고,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하고, 처방해주는 약 잘 먹고...등등’ 이러한 처방을 하고 있는 제가 한심했습니다. 그걸 몰라서 이 지경이 되었겠습니까? 뻔하고 공허한 얘기라지만 그런 말이라도 해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던 그 때, 그래도 이 학생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은 무엇일지 의욕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던 그 때, 그 의지를 한 번에 무너트리는 학생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괜찮아, 약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고3인데 어쩔 수 없지 뭐”

어쩔 수 없다는 말에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도대체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걸까요? 여기가 피 흘리는 군인도 대충 싸매고 다시 내보내야만 하는 전쟁터입니까? 어머니의 어쩔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 도저히 동의가 되지 않아서 애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열을 내서 다시 얘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러다 애 죽는다고, 이러다 애 큰일 난다고..

얼마 전에 분당 고3학생이 실종된 후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고3학생이라 대학입시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닐까라는 예상을 하게 되는 우리의 현실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자살의 순간은 복잡한 것이며 죽음을 선택한 당사자만이 정확한 이유를 아는 것이기에 우리가 함부로 자살의 원인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사회가 고3학생이 세상을 버려야 할 만큼의 아픔이 있다면 여전히 입시경쟁이나 학업부담부터 먼저 떠올려야 하는 사회라는 것은 너무나 서글픈 얘기입니다.

대책이 있냐고 물으면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저는 그때와 다름없이 그냥 식사 잘하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한다는 당연한 얘기나 할 수밖에 없는 의사입니다. 다만 이제는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엄마조차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 상황이 그렇게 쉽게 바뀔 일은 없겠지만 최소한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세상을 등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당연한 과제가 그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덮어버려 져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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